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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가족심리상담 , '모범적인 아이들의 삶'

p&cmaum 2023. 3. 29. 11:34

모범적인 아이들의 삶

 

글.박노해(마음)

 

모범적인 아이는 선생님의 관심과 칭찬을 받게 된다. 공부까지 우수하면 이는 금상첨화다. "애를 어떻게 저렇게 바르게 키웠느냐." "아이가 어찌 저렇게 반듯 하냐. 또 머리가 얼마나 좋길래 공부를 그렇게 잘하느냐." 등 입이 마르고 닳도록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그 관심을 받고 있는 아이의 마음은 은근히 부담되고 뭔가 더 잘해야 할 것 같은 구속감마저 느끼게 된다. 부모나 어른들이 아이를 위한다고 위한 것이 심리적인 구속감이 되어 아이에게 점점 더 자신을 옥죄는 심리적 올가미가 되는 경우가 있다.

모범적인 청소년의 경우 또래들과 달리 그 시기에 보이는 성에 대한 관심이나 변화에 대해서도 억압하고 아닌척하면서 막연하게 그런 관심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또 친구들의 대화 내용에도 관심이 거의 없다. , 부도덕, , 이기심, 욕심 등 이러한 것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하는 것을 매우 나쁜 것이라고 치부한다. 모범적인 학생들은 지나칠 정도로 조숙하고 성숙되어 의젓하고 어른스럽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결핍이란 속빈 강정과 비슷하다.

 

'착한 아이 혜진이'

 

혜진이 부모가 공개상담실에 딸이 등교거부를 거부한다며 이유를 알 수 없다며 도움을 청했다. 내용을 알아보니, 혜진이는 관심 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어릴 적 혜진이는 키우기 쉬운 순한 아이였다. 혜진이가 엄마를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귀여움을 독차지 했고 이후 동생이 태어나면서 아이는 더욱 누나답게 동생을 챙기고 보살피는 조숙함을 보였다. 어린이집을 다니고부터 착한아이라고 칭찬이 자자했고 유치원에서는 부담임이라는 직함도 부여받았다. 그러나 너무 조숙했던 것일까?

혜진이는 초등학교 입학이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학교선생님은 혜진의 조숙함에 대해 무관심했고 스스로 잘 알아서 하는 아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부적응하는 아이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챙기니, 혜진이는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학교등교를 거부하였다.

혜진이와 같은 아이들은 부모의 관심을 한껏 받다 동생에게 관심과 사랑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동생을 챙기고 예뻐하는 행동으로 부모의 관심을 사고 사랑받고자하는 기제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아동은 동생을 챙기고 보살피고 예뻐하며 엄마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러나 아이가 엄마노릇을 하자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착한 청소년 형준이'

 

형준이 이야기를 해보자. 형준이는 모범생에 공부도 상위권이다. 초등학교시절부터 모범생에 우등생으로 친구의 부러움과 선생님의 관심을 받았다. 부모도 형준이가 열심히 잘한다고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든 어느 날 형준이가 중3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교를 거부하며 이제는 학교생활을 못하겠다며, 학교 규칙이 싫고 공부가 무섭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부모는 황급히 형준이와 함께 상담실을 찾았다. 형준이의 말투는 조숙함을 넘어 노숙할 정도였다. "전 이제 하고 싶은 것이 없어요. 예전에는 과학자가 꿈이었지만 그 꿈도 포기했어요.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세상이 다 싫어요. 어릴 땐 공부로 먹고 살겠다고 결심도 했지만……."

형준이는 삶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본 청소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성실하고 모범적이고 공부도 우수해 반장은 독차지하고 늘 타의 모범이 되는 말 그대로 FM학생이었다. 어떤 이유로 형준이는 왜 공부로 먹고 살겠다고 결심한 것일까? 어린 시절이었지만 형준이는 이미 형과 자신이 경쟁자라는 사실을 인식했던 것 같다. 형준이는 대상을 인식할 나이 3살이 되자, 형에 대한 경쟁심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형의 한글공부를 위해 방문교사가 오는 날엔 먼저 현관문에 나가 선생님께 깍듯이 인사를 하고 탁자 옆에 앉아 선생님의 교육에 관심을 보이며 간절한 눈빛으로 관심을 호소하였다.

선생님은 "이야! 형준이 벌써 공부하려고 대단한데" 옆에서 엄마는 "형준이 공부 잘하겠는데"하며 한마디 거든다. 이렇게 길들여진 형준이는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더욱 더 공부를 열심히 했고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가면서 경쟁은 치열해졌다. 형준이가 모범적인 학생이 되기 위해 정서적으로 억압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심리적인 중압감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 부담이 너무 컸던 형준이는 등교거부를 했던 것이다.

 

'착한 여자 이미란씨'

 

이미란씨는 착하다. 많은 이들의 부탁을 들어줘야 마음이 편하다. 그녀는 36년을 살면서 싸워본 적이 없다. 유치원은 물론 초등, 청소년기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현재는 회사 중견간부로 책임을 다하고 있는데 상사는 물론 부하직원과도 어떤 갈등이 없다. 어찌 보면 유능하고 원만한 관계, 긍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그녀가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 깊숙이 갈등에 대한 부담과 회피기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만한 관계의 기제를 가진 그녀로써도 넘기 어려운 산이 있었다. 바로 결혼이다. 그녀의 원만한 대인관계특성도 남편과의 갈등은 피해가지 못했다. 남편과의 갈등에서도 그녀는 격렬한 말싸움이나 몸싸움은 상상하기 어렵다. 착한여자이기 때문이다. 싸운다는 것이 즐거울 일이야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싸울 일까지 외면한다면 그것은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착하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보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이면의 부정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착하다'는 덫에 걸려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착한아이란 부모, 어른, 선생님이 지시하는 기준, 규범, 약속, 성실, 학습 등 다양한 부분에서 자신이 수행해야할 몫을 해냄을 뜻한다. 이렇게 보면 착한의미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참고 많은 규율과 약속, 과업을 달성하기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금요일 저녁 5일간의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친구와의 술 한 잔, 그 유혹을 뿌릴 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또 인터넷 게임을 앞에 두고 그 유혹을 뿌리치는 청소년이 몇이나 될까? 상상만으로도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착한사람보다 분별력 있는 사람이 좋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유치원 때부터 성인이 된 현시점까지 사회는 수 없이 주장 한다. 서양의 많은 철학자와 동양철학자들은 수없이 인간의 성선설과 성악설을 고민하고 주장하였다.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한 가져야할 가치, 도덕, 예의, 규칙, , 약속 등 수 없이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많은 조건에 부합하기 위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한다. 그렇다고 무법천지를 만들자는 주장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나눔이라고 할 수 있다. 본능적인 욕구에 대한 조절과 지연, 그리고 나눔이야 말로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가장 근원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들은 매우 이성적이며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것들이다. 도덕적인 양심을 포기하고 원초적인 욕망과 무법이 판쳐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사회가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과 양심을 요구하는 것도 인간의 삶을 비인간화한다는 점이다.

왜 일까? 엄격한 도덕과 양심이 왜 인간의 삶을 비인간화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욕구충족과 행복은 원초적인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담배를 피울 때, 커피를 마실 때, 게임을 할 수 있을 때, 잠을 잘 때, 쉬고 있을 때, 가지고 싶었던 사진기를 가질 때 등등 우리는 기본적인 욕구충족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조금 더 삶의 의미를 고차원화 시킨다면 우리의 기쁨은 차원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Upgrade) 된 기쁨을 맛보게 한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위해 친절을 베풀 때, 장애우를 대신해서 도움이 될 때, 죽음에 임박한 이를 위해 곁에 있어주는 호스피스 등 거룩한 희생과 배려도 큰 만족과 행복을 준다. 이들은 원초적인 것에서 출발해서 고차원적인 것까지 모두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양보와 희생을 통해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한 두 번이야 몰라도 지속적이기는 어렵다. 또 어린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인내하고 지연하면서 장기간동안 자신의 욕구를 참아낸다는 것은 그 아이에게는 욕구 결핍으로 인한 상처가 될 뿐이다.

부모님들이 상담실에 와서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하나 있다. "어떨 때 야단치고 어떤 때 허용해주어야 하나?"라는 질문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적절한 그 중간지점을 찾는다는 것이 말이다. 그 중간지점도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니, 그 지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은 나쁜 아이, 나쁜 어른 그 중간지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가치관, 성격특성, 자신의 정서 등에 대해 점검해 보아야 한다. 적절한지 말이다. 자신의 특성이 혹 지나치게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는지 말이다. 내가 그동안 어떤 이유 때문에 내가 원하는 요구를 하기가 힘들었는지? 내가 왜 요구해도 되는 것을 어려워하는지? 왜 거절하기가 죽기보다 어려운지? 등등 자신의 특성의 근원적인 질문을 해보는 것도 자신을 찾아가는 길 중 하나다.

자신의 적절성을 회복하기 위해 자기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느 날 그 답을 얻기 위한 첫 출발일지 모른다. 어느 날 "아하!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구나!"하는 자기 통찰을 맞이할 때가 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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